폭우가 내리는 트랙 위에서 펼쳐진 레이스. 모든 것이 낯설었고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오전 내내 뜨거운 햇살로 우리를 지치게 했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리고는 앞이 안 보일 만큼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레이스 시작 15분 전, 드라이버와 팀, 미케닉과 경기 운영진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던져졌다. 전날부터 기상 예보를 수십 번 확인하며 오전까지 강수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오전에 진행된 예선전까지는 젖은 노면에서 계획대로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점심 이후 맑고 화창해진 날씨가 갑자기 돌변하며 시간당 30mm 이상의 폭우가 내릴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경기 시작 15분 전에 말이다. 경주차의 세팅과 추월 전략, 심지어 드라이버의 마인드까지도 온전히 마른 노면 상태에서 맞춰두었기에 갑자기 모든 것이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급하게 레이스를 위해 아껴둔 새로운 세미 슬릭 타이어를 빼고, 예선전에 사용했던 레인 타이어로 교체했다.


2026 래디컬 컵 코리아에 출전 중인 SLDS 모터스포츠 팀의 김용일 선수는 이번처럼 비가 많이 내리는 날 레이스를 해본 경험이 없었다. 그가 지금까지 용인 스피드웨어를 달리며 연습한 모든 감각과 데이터는 95% 이상이 마른 노면에 맞춰져 있었다. 젖은 노면은 전날 연습 세션과 예선전에서 살짝 경험한 것이 전부였다. 따라서 폭우 상황에서 브레이크 포인트, 주행 라인, 트랙을 따라 흐르는 물길의 구간 정보까지 모든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SLDS 모터스포츠 팀의 코치이자 드라이버인 나는, 2024년에 이번과 비슷한 상황에서 경기를 해본 적이 있었다. 따라서 김용일 선수가 어떤 기분일지, 트랙 위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수중전에 맞춘 새로운 계획은 중요하지 않았다. 경기 30분 동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순간순간에 맞는 임기응변뿐이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트랙을 달리며 다른 드라이버들을 따라 최대한 용감하게 가속 페달을 밟아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코너에 처박히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다. 그뿐이다.

경기는 엄청난 폭우로 세이프티카와 스타트로 시작됐다. 가장 앞을 달리는 세이프티카를 따라 모든 경주차가 일렬로 달렸다. 시속 100km 이하의 웜업 속도에서도 경주차는 일부 구간에서 직선으로 달리지 못했다. 트랙의 높은 구간에서 낮은 구간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빗물의 양이 너무 많아서 경주차가 마치 물 위에 뜬 보트처럼 횡방향으로 미끄러졌다.
“오늘 누구 한 명 크게 사고 나겠는데…”. 극도의 공포와 패닉이 팀과 드라이버의 어깨를 짓눌렀다. 모든 드라이버가 포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경쟁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면 천천히 달릴 수는 없었다. 모두에게 같은 조건이라면, 이를 악물고 누군가를 추월해야 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나는 김용일 선수의 경주차에 브레이크 조절 장치를 평소보다 뒤로 돌려 뒷바퀴 제동력을 좀 더 확보해 두었다. 무리한 주행으로 스핀하기보다는 전체적으로 균형을 맞춘 설정이었다. 세팅 정보를 그에게 일부러 공유하지 않았다. 너무 많은 정보는 집중력을 떨어지게 한다. 단지 그가 모든 감각에 빨리 적응하기를 바랄 뿐.

적기 발령! 폭우로 드라이버들의 안전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슈퍼레이스 경기 운영팀이 경기를 일시적으로 중단시켰다. 단 세 바퀴 만에 모든 경주차가 다시 피트로 돌아왔다. 마치 전쟁터에서 돌아온 병사들처럼 모두가 흥분된 상태로 자신이 겪은 위험 상황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주의를 줬다. 비는 약간 잦아들고 있었지만, 노면의 상황은 쉽게 좋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약 10분 후, 경기는 세이프티카 스타트로 재개됐다.
그렇게 다시 모두가 일렬로 폭우 속에 세 바퀴를 돌았다. 그리고 선두의 세이프티카가 피트로 빠지면서 선두인 SR10 클래스 경주차를 시작으로 모든 경주차가 레이스를 시작했다. 시간상 남은 주행은 8랩. 짧기 때문에 100% 집중해서 버텨야 했다. 추월의 기회를 간 볼 시간이 없다. 무조건 앞 차에 붙어야 한다. 하지만 막상 비가 내릴 때 앞차에 가까이 붙어 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직선에서 앞차가 만들어내는 물보라 때문에 후방 드라이버의 시야는 극도로 제한적이다. 래디컬처럼 오픈 콕핏 레이스카는 빗물이 드라이버에게 그대로 쏟아진다. 당연히 헬멧에는 와이퍼가 달려 있지 않다. 폭우가 내리는 날, 윈드실드에 와이퍼를 켜지 않고 달리는 느낌이랄까. 거기에 헬멧 바이저 안에 습기까지 차서 앞도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드라이버에게 같은 상황. 그저 집중해야 한다. 그동안 연습했던 코스의 모든 정보를 머릿속으로 그래픽화 해서 부족한 시각정보를 보충하는 수밖에 없다.


김용일 선수는 비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이를 악물고 전력을 다해 달렸다. 앞으로 다가올 찰나의 순간을 미리 예측하고 반응하는 게 중요했다. 기록으로 보면 제동이나 가속 구간에서 타이어가 미끄러지며 랩 타임에 손해를 보는 구간이 있었다. 하지만 실수를 조금씩 줄여갔다. 6 랩에 접어들었을 때 빗길 주행에 조금은 적응하고 안정된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스핀하지 않고 경주차를 잘 이끌어 갔다. 자신감을 가지고 코너의 탈출 부분을 향해 적극적으로 운전 중이라는 증거였다. 그는 그렇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렸다.
폭우 때문에 레이스가 60% 이상 줄어들었기에 아쉽게도 추월을 시도할 시간이 부족했다. 결국 김용일 선수는 4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엄청난 악조건에서도 사고 없이 살아 남았다는 것으로도 큰 경험이었어요.” 이번 라운드는 승부보다는 자동차를 제대로 제어하기 힘든 상황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려서 결승선을 통과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경기는 단 두 경기. 이제부터 드라이버 포인트 관리도 중요하다. 다음 경기에는 경쟁자보다 무조건 앞서야한다. SLDS 모터스포츠 팀은 이미 래디컬 컵 코리아 5라운드 준비를 시작했다.
글 김태영(모터 저널리스트)
사진 래디컬 코리아, 김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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